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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페이지 내용 : naeiledu 37 중국과 일본에서 K-시 詩 열풍 일으킨 주역 Feat. 허난설헌 1571년 어느 날, 광한전백옥루상량문 이라는 웬 무협지 제목 같은 시 한 수가 조선 문단을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발생했어. “뭐? 8살짜리 꼬맹이가 이걸 썼다고?” “초당 허엽 선생 딸내미 작 품이래” “역시 천재 집안이라 다르네, 달라.” 내 이름은 허초희, ‘난설헌’이라는 호로 더 유명하지. 강릉의 명문가였던 우리 집안은 아버지를 비 롯해 남매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허씨 5문장 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 ’이라 불렸어. 양반 가문에서조차 여성의 교육을 금하던 암흑 같은 시대였음에도 아버지는 내게 맘껏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 특히 12살 많은 둘째 오빠 허봉은 시에 두각을 나타내는 날 위해 최고의 스승을 모 셔다줄 정도로 이 여동생을 아끼고 사랑해주었단다. 사임당 언니 때와는 다르게 조선 중기 이후부턴 결혼을 하면 거의 모든 여자가 바로 시집에 가서 살아야 했어. 15세… 그 어린 나이에 김성립이라는 인간이랑 결혼한 나도 예외는 없었지. 시집살 이는 참 고됐어. 시댁 어른들은 내가 똑똑해서 남편이 기를 못 편다며 구박했지. 의지할 사람은 남 편뿐이었지만 그도 날 사랑하지 않았어. 난 늘 지인들에게 3가지 한이 있다고 말했어. 조선에서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이백이나 두목 중국 당 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이지. 같은 남편을 만 나지 못한 것. 그렇게 좋아하고 의지했던 친정아버지와 허봉 오빠가 죽고 이이의 탄핵을 주장하다 귀양을 가 건 강을 잃었거든. 사임당 언니와 난 얄궂은 인연이네. 사랑하는 딸과 아들마저 저세상으로 보낸 뒤 살 희망을 잃어버린 난 27세에 죽음을 맞이했어. 짧은 생을 마감하며 ‘내 글을 모두 태우라’고 유 언을 남겼지만 홍길동전 의 저자인 동생 균이가 내 시를 외우고 있다가 난설헌집 을 남겼지. 뜻 밖에도 난설헌집 은 중국 명나라로 건너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후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 어. 하지만 균이까지 역모 혐의로 죽게 되자 내 시집도 조선 땅에서 모두 불태워 사라졌단다. 재미 있는 사실은 내 시가 1692년, 죽은 지 103년이 지나 일본에서 역수입됐다는 거야. 훗날 정조 임금 도 이를 읽고 감탄했다지. 가끔 내가 고려 시대나 조선 초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그럼 조 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덜 아프지 않았을까 하고 말야. 신사임당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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