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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페이지 내용 : 64 Weekly Education Magazine 내일신문·내일교육 공동 기획 글 이상무 교수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조선 시대 학교의 수업 방식 교육학 이론으로 다시 보는 교육 이슈 ⑨ COLUMN #칼럼 #교육학_이론으로_다시_보는_ 교육_이슈 독자들 중에서는 디지털 대전환을 맞이해 빠르게 변화 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웬 조선 시대 교육?’이라고 생 각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 보면 한가한 이야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힌트를 얻기도 한다. 조선 시대 향교의 등교 방식 많은 사람들은 학교에 간다고 하면, 평일에는 매일 등 교를 기본으로 생각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3월부터 7월 중순까지, 8월 중순부터 12월 말이나 1월 초까지는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을 당 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이러한 등교 방식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매일 학교에 통학할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어 야 가능한 방식이다. 여기에는 교통수단의 발달도 큰 기여를 했다. 조선 시대에 향교는 오늘날의 시·군 단위인 부·목· 군·현마다 하나씩 설치됐다. 지역 내에서 대성전 大成 殿 이라고 하는 공자의 사당을 갖춘 유일한 교육기관 이라는 점에서 그 위상은 확고했다. 어떤 지역에 살고 있는 학생이 향교에 다닌다고 한다면 해당 지역에 있 는 향교로 가야 했다. 예컨대, 지금의 서울 노량진 지 역은 조선 시대에는 과천현 縣 에 속한다. 노량진 지 역에 살고 있는 학생은 과천향교로 와야 한다. 현재 노 량진역에서 과천 시내까지 도보로 약 3시간이 걸린다. 이런 상황에서 매일 등교하는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했 다면 시간 낭비일 것이다. 그래서 향교에는 동재 東齋 와 서재 西齋 라는 기숙사가 있었다. 문제는 이 기숙사 의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향교의 정원은 행정구역의 크기에 따라 3090명이었 다. 상당수는 정원이 30명인데, 향교의 동재와 서재를 직접 봤다면 거기에서 30명이 한꺼번에 숙박할 수 있 는 공간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바로 알 수 있 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동재와 서재를 활용했을 까? 바로 분번거학 分番居學 이라고 하는 방식이다. 서울대 교육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취득 후에는 한국교육개발원 부연구위원, 한남대 교육학과 조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조교수를 역임하고, 2023년 9월부터 서울대 교육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 시대 교육 제도 및 과거 제도를 주로 공부하며, 최근에는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지역 교육사로 연구 영역을 넓혀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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